케레이트

위키백과, 우리 모두의 백과사전.
둘러보기로 가기 검색하러 가기
케레이트
ᠬᠡᠷᠡᠶᠢᠳ

 

11세기1204년
유목 연맹체
Mongol Empire c.1207.png
몽골 초원 통일 직후인 1207년경의 지도. 케레이트는 남쪽에 해당한다.
수도 불명
정치
공용어 중세 몽골어
정부 형태 선거군주제

12세기 초 ~ 1144년?
1144년? ~ 1165년?
1165년? ~ 1203년

마르쿠스 부이루크 칸[1]
쿠르차쿠스 부이루크 칸
옹 칸[2]
입법 쿠릴타이

기타
국교 네스토리우스파 기독교

케레이트(몽골어: ᠬᠡᠷᠡᠶᠢᠳ)는, 몽골 제국 이전 시대에 몽골 고원 중북부 한가이 산맥 부근에 흩어져 살던 유목민 부족의 집단이다. 한자로는 객렬액(客烈亦), 겁렬(怯烈), 겁렬액(怯烈亦) 등으로 표기되었다. 페르시아어 사료에는 키라이트(페르시아어: كرايت)등으로 표기되어 있다.

명칭

케레이트(Kereyid~Geryid)라는 이름은 케레이(Kereyi~Gereyi)의 복수형이다. 라시드웃딘의 『집사』(集史)에 따르면, 「케레이」의 의미는 그 선조의 얼굴 색이 검었다는 데에서 유래한 것이라고 설명하고 있어, 「까마귀」의 몽골어인 케리예(keriye)에서 유래했다고 보인다. 오르도스에는 지금까지도 퀘리트(K'erit)라 칭하는 대(大)・소(小)・흑(黒)・백(白)의 소규모 유목집단이 잔존하고 있으며 키르기스족 가운데서도 Kiräi~Giräi라는 이름의 유력 씨족이었다고 여겨진다. 테르킬(쥬르킨), 톤카이트(콘카이트), 튜마왓(토베엔), 사키아트(사카이트), 에리아트(알바트) 그리고 케레이트의 여섯 씨족으로 구성된 케레이트는 지배층인 케레이트 씨족의 성씨를 따서 그 부족의 이름을 통칭하였다.

역사

기원

케레이트의 기원은 위구르 제국(회흘)를 멸한 키르기스 제국(힐알사)를 몽골 고원에서 쫓아낸 몽골계 부족 집단(구성九姓타타르) 가운데서도 가장 유력한 종족이었던 것으로 보인다. 케레이트의 선조에 해당하는 이들 부족은 함께 키르기스를 몰아낸 위구르 분파인 나이만 연합과는 몽골 고원을 놓고 치열하게 다투었다. 이슬람 학자 아부 하라지에 따르면 11세기 초 케레이트는 온구트, 나이만 등 서쪽 유목 부족들과 함께 네스토리우스파 크리스트교를 신앙하며 위구르 문자를 사용하고 문화적으로 앞선 부족이 되었다고 한다.

조복(阻卜)

중국의 《요사》(遼史)에 나오는 조복(阻卜)이라는 민족이 케레이트로 비정된다. 거란 성종(聖宗)은 조복 부족들에 절도사를 각각 임명해 파견하고 그 분할 통치를 밀어붙였지만 그들은 이에 저항해 반란을 일으켰고 카톤 바리크(可敦城)를 포위하기까지 하였다. 오고(烏古)도 이 반란에 호응해 거란에 들고 일어났다. 반란은 진압되었지만 이를 계기로 요 왕조의 서북방 경영에는 큰 차질이 생겼고, 1026년 거란군이 감주(甘州)의 위구르를 치다 실패한 것을 계기로 조복 부족들은 거란의 통제에서 벗어나, 조복 부족을 통합한 북부 조복의 마고사(磨古斯)가 1089년에 요 왕조로부터 그 왕권을 인정받았다.

마르쿠즈 부이룩 칸(샤리크 칸)

마고사는 『집사』에 기록된 마르쿠즈 부이룩 칸(Marghūz Būīrūq Khān)으로 비정되고 있다. 그러나 바일 누르에 살던 타타르의 수장 나우르 뷔루크 칸(Nāūūr Būīrūq Khān)은 기회를 노려 마르쿠즈 부이룩 칸을 생포해 거란족 군주에게 넘기는 데 성공했고, 마르쿠즈 부이룩 칸은 나무 당나귀에 못박혀 처형당했다. 마르쿠즈의 아내 쿠록타이 하리구치(쿠록타니 케렉친)은 복수를 위해 타타르에 술을 바치겠다고 속여 1백 온도르의 마유주(馬乳酒)를 준비해 타타르로 갔다. 그러나 안으로 들어간 것은 마유주가 아닌 무장한 용사 백 명이었고 도착하자마자 이들은 나우르 뷔루크 칸을 비롯한 타타르 부족 사람들을 차례대로 죽였고, 이로써 쿠록타이 하리구치는 남편의 복수를 할 수 있었다.

『집사』에는 샤리크 칸(Sarïq Qān)이라는 인물이 등장하는데 마르쿠즈와 동일인물로 보인다. 그는 알치 타타르와 북몽골리아 요지의 알칸 산을 놓고 격렬히 싸웠다. 처음에는 타타르의 한 수장 쿠무스 샤이쟌(Kümǖs Saïǰāng)을 산 아래까지 몰아붙였지만 방심하고 있던 차에 다른 타타르 수장 코리다이 다일(Qōrïdāī Dāyīr)에게 기습당해 대패하였다. 궁지에 몰린 샤리크 칸은 하는 수 없이 적대하던 서쪽의 이웃 대국 베테킨 나이만 족의 바이루크 칸에게 구원을 요청하였고 베테킨 씨족은 그 기회를 놓치지 않고 그들의 딸을 샤리크 칸의 아들 쿠르챠쿠스에게 시집보내어 샤리크 칸을 포섭, 동부 몽골리아로의 세력 확대를 꾀했다. 베테킨 나이만과 인척이 된 샤리크 칸은 며느리의 오빠인 카질 칸(Qāǰïr Qān)과 협력해 새로 군을 일으켜 타타르를 쳐부수고 자국의 재흥을 이루었다. 이 때 케레이트를 몰래 지지하고 있던 것은 몽골로 그들은 용맹함으로 이름높았다. 베테킨 나이만은 샤리크 칸을 도운 대가로 그의 휘하에 있던 몽골 군사를 요구했다. 샤리크 칸은 응하지 않았지만 몽골은 케레이트의 쇠퇴를 알고 차츰 케레이트를 이탈하기 시작하였다.

마르쿠즈의 두 아들 쿠르쟈크 부이룩 칸과 쿠르 칸(Kūr Khān) 중 마르쿠즈의 뒤를 이은 것은 장남 쿠르쟈크였다. 그 또한 숱한 고난을 딛고 마침내 위구르 제국의 수도 카라 바르가순을 본거지로 삼아 케레이트를 부흥시켰다. 그러나 그가 죽은 뒤 40인의 아들이 칸 자리를 놓고 다투었다(물론 이를 우려한 쿠르쟈크는 생전 그의 아들들에게 각기 땅을 나누어 주었다).

옹 칸예수게이 그리고 테무진

쿠르쟈크의 아들 가운데 한 명인 토오릴(토그릴)은 아버지 사후, 아버지의 지위를 이어받은 형제 타이테무르 타이시(Tāitīmūr Tāīshī)와 부카테무르(Būqā Tīmūr)를 죽이고 아버지의 지위를 빼앗았다. 이때 동생인 일케 카라(IrkeQarā)가 나이만으로 달아났다가 나이만의 도움으로 나라를 되찾고 토오릴을 내쫓았고, 토오릴은 몽골 부족의 예수게이 바토르에게 달아나 다시 그의 도움으로 일케 카라를 내쫓고 다시 나라를 차지했다. 그러나 이번엔 삼촌 쿠르 칸이 와서 토오릴을 몰아내고 그 지위를 빼앗았다. 그것을 들은 몽골의 예수게이 바토르는 다시 토오릴을 도와 쿠르 칸을 밀어냈고 쿠르 칸은 탕구트의 땅으로 달아나 다시는 돌아오지 않았다. 이때 토오릴과 예수게이 바토르는 의형제를 맺고 동지(안다)의 사이가 되었다. 몇 년 뒤 토오릴 칸은 또 나이만의 지원을 받은 일케 카라에게 나라를 빼앗기고 서쪽으로 카라 키타이로 달아나 원조를 바랐으나 받아들여지지 않았고, 몇 년 동안 양떼를 거느리고 방랑 생활을 보내게 되었다(예수게이 바토르 역시 타타르의 음모로 독살당했다).

1196년 봄, 예수게이 바토르의 아들 테무진이 자라 여러 부족장이 되었다는 소식에 토오릴 칸은 그를 만나기 위해 구세우르 호수에 나갔다가 테무진과 회견할 수 있었다. 테무친은 아버지의 옛 친구를 반갑게 영접했고 속하에서 징수한 가축세를 주었다. 그 가을 테무진은 토라 강에서 연회를 열어 토오릴과 부자의 연을 맺었다. 그 뒤 케레이트의 쥬르킨 씨족으로 진군하고 두 수령 사챠 베키와 타이츄를 포로로 잡았다. 또 타타르의 수장 메그진 세울토 등이 금(金) 왕조의 의논을 따르지 않았다는 이유로 금의 왕경승상(王京丞相)이 군대를 이끌고 타타르 토벌을 시작했다. 이것을 들은 테무진은 아버지의 원수를 갚는 절호의 기회로 생각하고 동맹자인 토오릴 칸과 함께 타타르의 메구진 세울투가 있는 곳으로 쳐들어갔다. 메구진 세울투는 성채를 쌓고 농성했지만, 테무진군에 붙잡혀 그 자리에서 살해됐다. 이것을 들은 왕경 승상은 크게 기뻐하며 테무진에 쟈우토크리라는 칭호를, 토오릴 칸에게는 온(왕)이라는 칭호를 주었다. 이후 토오릴 칸은 옹 칸(OngKhān)라고 불리게 되었다.

1197년, 옹 칸과 테무진의 동맹군은 메르키트 원정에 나서서 승리를 거두었고, 테무진은 전리품을 모두 옹 칸에게 넘겼다. 그러나 테무진의 구조로 궁지에서 벗어난 옹 칸은 이듬해 테무진과의 상담도 없이 다시 메르키트를 원정하는 등 병력을 모았다. 옹 칸은 메르키트를 부라 케이르 땅에서 쳐부수고 족장 토크토아 베키의 아들 구즈 베키를 죽였으며 그 아들 치라운과 동생 쿠드를 잡았다. 그 가족과 가축을 모두 전리품으로 거두고도 테무진에게는 하나도 주지 않았다.

1199년에 옹 칸은 테무진과 함께 나이만을 치러 나섰다. 동맹군은 나이만의 내분을 틈타 나이만 왕 뷜크 칸을 쳐서 많은 포로와 가축을 거두었다. 이때 함께 한 몽골 쟈디디라트 씨족의 쟈무카는 테무진을 시기해 옹 칸을 꾀어 테무진을 배반하였다. 테무진은 샤아리 케르로 퇴각하지만 이를 본 나이만 장군 사부라크는 옹 칸을 추격해 그 동생 빌카와 쟈하감보(케레이테이)의 가족과 가축, 물자를 빼앗았고 케레이트 영토를 침입해 약탈하였다. 옹 칸은 아들 일카 생굼을 적군에 보내고 테무진에게 사신을 보내 구원을 청했다. 테무진은 배신감을 느끼면서도 원군을 보내 나이만을 격퇴하고 케레이트가 빼앗겼던 것을 모두 옹 칸에게 돌려주었다.

1200년, 옹 칸과 테무진은 몽골의 타이치우트 씨족을 치고자 샤아리 평원에서 회견하였다. 동맹군은 타이치우트 씨족을 쳐서 그 수령 쿠드타르와 타르구타이 쿠릴투크를 쳐부수고 우렌우트 토라스라는 땅에서 잡아 죽였다. 그 겨울에 옹 칸의 동생 쟈하감보와 네 명의 케레이트 장군들이 옹 칸을 살해하려다 발각되어 나이만으로 달아났다.

1202년, 테무진과 옹 칸은 타타르를 치고 이어 메르키트, 나이만, 타타르, 도르벤, 카타킨, 샤르지우트, 오이라트 연합군을 칠 무렵 유랑하던 쟈무카가 옹 칸에게 도망쳐와 그의 비호를 받게 되고 테무친이 이를 비난하자 쟈무카는 일카 센겐을 꾀어 테무진을 죽이게 했다.

1203년에 마침내 테무진과 케레이트 사이에 전투가 벌어졌고 양측은 완전히 갈라섰다. 가을에 테무진은 옹 칸 부자를 테테르 운듀르 산에서 기습해 격전 끝에 옹 칸은 달아나고 나이만의 땅을 지나다 옹 우손이라는 땅에서 나이만 국경 경비대장에게 살해되었다. 그들은 옹 칸의 목을 나이만 왕에게 보냈고 나이만 왕은 옹 칸을 죽인 것에 노해 그 목을 은 그릇에 담아 보존하였다. 아들 일카 센겐은 게리 토벳 지방으로 망명했지만 그곳에서 약탈을 벌이다 현지 주민의 분노를 사서 카슈가르와 호탄 여러 주에 가까운 쿠샨 지방으로 넘어갔다가 쿠샤트 챠르 카슈메라는 땅에서 잡혀 그곳 영주 카라지 족의 술탄 키리지카라에게 처형당했다.

이로써 케레이트는 몽골에 정복되었다.

몽골 제국 이후의 케레이트

1206년 테무진이 칭기즈 칸으로 즉위하는 몽골 제국이 성립한 뒤에도 케레이트는 칭기즈 일문의 인척으로써 몽골 유목 부족 연합의 유력 부족의 하나로 존속하였다. 칭기즈 칸의 넷째 아들 툴루이의 부인으로 몽케 칸(원 헌종), 쿠빌라이 칸(원 세조)의 어머니가 된 소르칵타니 베키는 쟈하감보의 딸이자 옹 칸의 조카다. 일 칸국이 다스린 서아시아에서 시기에 따라서는 기독교인이 우대되는 등 몽골 왕가의 기독교도에 대한 호의적인 자세는 케레이트 왕족과 귀족들을 통해 몽골 제국의 왕족, 귀족에 수많은 기독교인이 포함된 것과 무관하지 않다. 또 케레이트 출신으로 몽골 제국에서 군인, 관리로 활약한 사람도 적잖이 역사에 나타난다. 예를 들어 우구데이 칸(원 태종) 때에 서기 관리(비치크치)의 장관으로 활약한 진카이는 출신에 대해 여러 설이 있지만, 케레이트 출신이라고 하는 설이 존재한다.

몽골 고원에서 케레이트 부족의 이름은 제국의 해체와 함께 이윽고 그 이름은 역사에서 사라졌다. 단, 15세기 이후 오이라트 부족 연합에 속하며 현재도 존속하고 있는 토르구트는 케레이트의 후손으로 알려져 있다. 한편 몽골 제국의 확장과 함께 중앙 유라시아 전역으로 확산된 케레이트 부족의 이름은 몽골 고원보다 서쪽 지역에서 더 오래 남았고, 현재도 카자흐스탄 등 중앙 아시아의 투르크인들 사이에서 케레이트의 이름을 찾을 수 있다.

각주

  1. 샤리크 칸이라고도 불린다.
  2. 재위 초반에 동생인 일케 카라와 숙부인 쿠르 칸에게 지도자 자리를 빼앗기기도 했다.